2016년 7월 27일 수요일

0. 서설

조정이 타락하여 관리들이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나라의 관리들은 누구의 재산이 더 많은가 서로 경쟁하기에 바빴고, 그로 인해 백성들의 굶주림은 날로 더 심해져만 갔다. 나라를 세운 첫 번째 임금으로부터 열 번째 임금인 명왕이 나이가 차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대를 이어 임금 자리를 물려 받은 것이 바로 근왕이었으니, 머리가 모자라고 말주변이 없어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평이 돌았으나 자존심 하나만큼은 하늘을 찌르는지라 조정의 부패한 주변 권력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재위를 반기더라. 이는 어리석은 임금을 앞에 세워 나라의 모든 부귀와 권력을 자신들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의 자존심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고자 함이었다. 근왕의 측근들은 달콤한 말로 임금을 현혹하여 나랏일로 부터 관심을 거두게 하고,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족들을 나라 곳곳 지방의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의 뿌릿속부터 양분을 빨아먹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생충의 왕국이 되어버린 것이라.

어느 지방 관청인지 명확치 않으나 이 나라 어느 곳을 가든 이와 같지 않겠는가. 이른 아침부터 관청 앞은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관청 대문앞을 지키고 섰는 병졸들 사이로 수십명의 사람들이 양 손이 결박된 채로 발목에 두꺼운 족쇄를 차고 줄을 지어 들어가고 있었으니 그 발걸음이 천근 만근 되는냥 바닥을 질질 끌며 먼지를 날리더라. 개중에는 이제 막 열 살 남짓 어린아이도 있고 종아리 부분이 다 해진 치마를 두른 아낙도 있다. 대체 이들이 무슨 대역 죄인이라서 이런 끔찍한 몰골로 끌려가는가 하여 살펴보니 아무래도 또 관청의 돈놀이에 희생된 것이 분명하더라. 나라에서 사람들에게 과한 세금을 물리니 백성들 중 가장 가난한 빈곤층은 아무리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여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죽을 날만을 바라보더라. 나라의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 관청에서 이를 악용하여 당장에 굶주린 이들에게 고리로 돈을 꾸어주니 빌린 돈으로라도 배를 채우지 않고서는 배길 재간이 없는 것이라. 이렇게 돈놀이로 벌어들인 수익금이 나랏일에 쓰일 리 만무하고 전부 관청 관리들의 뒷주머니로 들어가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로다. 살기 위해 빌린 돈을 제때에 갚지 못하여 빚은 점점 늘어가고 생활은 오히려 더욱 빈곤해지는 것이었다. 이들을 잡아다가 죗값으로 이것저것 노동을 시키며 피를 빠는 것이 나름대로의 돈벌이가 되던 때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감옥에 갇힌 사람이 늘어나면서 일거리 보다 죄인이 많아지니 이 또한 골치아픈 일이 아닐수 없더라. 이쯤되니 관청의 관리들이 꽁짓돈만큼도 안되는 적은 돈을 몰래 받아 대출 명부를 조작하고 죄인을 풀어주는 뒷거래가 생겨나고, 세간에는 관청에 갚을 돈을 또 꾸어주고 이자를 챙기는 요상한 이중 사채업자들까지도 생겨나더라.
"어이구 오늘도 잔뜩 들어왔구만요."
관청 대문을 지키던 병졸이 골치아픈 표정으로 말을 헌다.
"이미 관청 내 감옥마다 사람들로 그득해서 더 이상 넣을 곳도 없습니다요."
병졸이 죄인들을 인계받으며 푸념을 늘어놓자 경부 경사가 호되게 꾸짖는다.
"이놈, 주둥이를 닥치거라. 사흘 전에 들어온 놈들 가운데 오늘 정오까지 대출금을 변상하지 못하는 놈들은 바로 목을 칠 것이니, 그곳에 자리가 비면 넣거라."
관청 경사의 냉혹한 꾸짖음에 끌려가던 아이 하나가 겁을 집어먹고 울음을 터뜨리자 그의 어미로 보이는 아낙이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벌벌 떨며 경사의 눈치를 본다. 빼액 하고 짧게 우는 소리에 심기가 거슬린 경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목봉을 꺼내어 들고 그 모녀에게 다가서는데, 저어기 지저분한 관청 담벼락 모퉁이 쪽에서 한 여인이 급하게 뛰어와서는 숨을 헐떡이며 경사를 붙든다.
"아이고 경사 나리, 중한 서찰을 가져왔으니 보아주십시오."
아낙이 허연 봉투로 잘 봉인된 서찰과 함께 금전 두개를 얹어 내미니 경사는 금전부터 주머니에 잽싸게 챙겨 넣고는 봉투를 뜯어 그 자리에서 읽더라. 으음 하고 서찰을 훑어 보던 경사가 관청 안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멈춰 세우고는 소리를 친다.
"게 중에 서원 단지 제지공의 차남이 있는가!"
경사의 물음에 무리 중 한 사내가 겁먹은 표정으로 슬며서 손을 든다.
"그대가 청주관청창 어르신의 아드님 친구분의 안 마님과 육촌 지간이라는 것이 사실인가."
겁먹은 사내가 어리둥절하여 대답을 못하자 서찰을 가지고 온 여인이 사내에게 눈치를 주며 경사에게 맞습니다, 맞습니다요 하며 굽실굽실 허리를 숙인다.
"진작에 그리 말을 하지 그랬나. 큰 변고를 겪을 뻔 하였군. 여봐라, 이자를 풀어주어라. 이자의 빚은 이미 변통되었다."
경사가 새까맣게 이름이 적힌 장부 한쪽에 줄을 휙 그으며 명하니 병졸이 달려와 족쇄를 풀어준다. 서찰을 가져온 여인은 죄인들 무리로 달려가 풀려난 사내를 끌어안고 엉엉 울며 관청 대문을 빠져나가더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사람들이 혹시나 나는 누가 구해주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감에 관청 대문 밖을 흘끔흘끔 둘러보다 병졸이 휘두른 목봉에 등짝을 딱 하고 두드려 맞고는 꿈틀대며 관청 안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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