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유달산의 플럼가 저택에 한 사내가 찾아왔는데, 주린 배를 감싸쥐고 산 중턱까지 올라온 것도 힘이 들었는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행색이더라. 바짓단이 완전히 닳아 비쩍 골은 다리 한쪽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그 사내는 횃불을 든 검은 옷의 거구에게 이끌려 저택 주인인 노신사 앞에 엎드리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나."
노신사가 물으니 비쩍 골은 다리의 사내가 흐리멍텅한 눈동자를 굴리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저어...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해 입에 풀칠할 것을 좀 빌러 왔습니다요."
비쩍 골은 다리의 사내는 너른 지방을 주름잡는 목포 검계의 수장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거렁뱅이의 부탁을 들어줄리 있겠는가 생각하면서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악이라도 해 보자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청하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찾아온 것인가."
노신사가 얼음장 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사내는 무엇하러 내가 이 무서운 곳을 찾아왔던가 후회하며 머뭇거리다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매 겨우 고개를 반쯤 들고 대답한다.
"너른 지방의 대검계 수장이신 빈센트 큰 어르신께서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청을 들어주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요."
사내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노신사가 허허 웃으며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에게 무엇을 줄텐가."
"이예?"
"나에 대해 알고 왔다면 플럼가의 수장은 득이 되는 일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왔을 터, 내가 자네에게 먹을 것을 내어 주면 자네도 내게 무언가 득 되는 것을 주어야 수지 타산이 맞지 않겠는가."
빈센트의 말에 사내가 말문이 막히어 주저하다가 간신히 입을 뗀다.
"보시다시피 저는 가진 게 이 비천한 몸뚱이 뿐인 거렁뱅이인뎁쇼."
"그거 좋은 거래로구먼."
"이예?"
"여보게, 이자에게 쌀 한말을 내어주게."
빈센트가 명령하자 옆을 지키고 섰던 검은 옷의 거구가 미리 준비라도 해 두었다는 듯이 쌀이 반쯤 담긴 자루를 엎드린 사내 옆에 턱 하고 내려놓는다. 비쩍 골은 사내가 어리둥절하여 엎드린 채로 위를 쳐다보느라 눈썹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눈앞에 놓인 쌀 자루로 시선을 다시 옮긴다.
"쌀 반자루에 사람을 하나 얻는 것은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비쩍 골은 사내는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자루를 벌려 진짜 쌀이 들어 있는지 확인한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자루 안에 슬쩍 손을 넣어 쌀 몇톨을 집어 입에 넣고 씹어 본다. 깨끗하게 잘 타곡된 생쌀의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가득 퍼지니 이것이 진짜 먹을 수 있는 쌀이구나 싶어 손을 달달 떨며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히더라.
"잘 알다시피 나는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네. 만일 내게 손이 필요할 때 자네가 도와주면 좋겠구먼. 이것이 거래의 조건일세. 어떤가, 만일 조건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그 쌀자루를 그냥 두고 돌아가도 좋네."
"아이고 큰 어르신, 아무렴요 아무렴요. 제가 어르신을 위해 목숨을 다하겠습니다요."
사내는 혹여나 쌀자루가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쌀자루를 품에 꼬옥 끌어안으며 바닥이 닳도록 몇번이고 절을 하였다.
비쩍 골은 사내가 돌아가고 나서 빈센트가 몸을 일으켜 안채로 들어가려 하니 안채 뜰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검은 옷의 거구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렇게 퍼 주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퍼 주는게 아닐세. 화를 달래는 것이지."
빈센트는 몸을 돌려 마루 앞쪽으로 걸어나와 유달산 위로 걸려 있는 비쩍 마른 달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왜, 걱정이 되는가."
"오늘만 벌써 네번째입니다. 이러다 소문이 퍼지면 금새 모든 고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몰려들 것입니다."
검은옷 사내의 조심스런 조언에 빈센트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화가 닥치는 법, 저 어리석은 탐관오리들은 부정에 눈이 멀어 제 잇속만 챙기느라 백성들의 화가 차오르는 것을 눈치재지 못하고 있네."
빈센트가 유달산 아래 덕지덕지 들러붙은 목포 백성들의 누더기 같은 가옥들을 차분히 내려다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었다.
"조만간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구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