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이가 누구더냐고 물으면 온 백성이 하나같이 임금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수도 서울 북악산 아래 남쪽으로 큰 강을 내려다 보며 동으로 종묘의 조상들이 보살피고 서로 사직의 신령들이 지켜주는 오색 보석과 황금의 궁궐에 머무는 자보다 더 높은 이가 누가 있으랴. 허나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겉만을 훑고 판단하는 것이니 실제로 이 나라 조정이 어떠한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도다. 자고로 임금이라는 자리가 모든 국사를 정하고 온 백성을 이끄는 어버이 같은 존재라고들 알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가 못하더라. 국운을 결정짓는 나라의 모든 정책과 기조는 임금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니, 임금의 바로 아래 나라의 최고 관리라 알려진 삼정승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 이는 그 권력의 순으로 영의정 아래 좌의정 또 그 아래 우의정이 있어 이 세 정승의 합의 하에 모든 국가적 정책이 결정되고 임금은 그저 그를 승인하는 것 뿐이더라. 그러하다 보니 가장 높은 관직인 영의정 자리에 오른 이가 바른 마음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면 온 백성이 평안하고 부유하여 극락과도 같은 삶을 살고, 그가 악한 마음을 품고 사리 사욕을 채우려 들면 이 나라 전체가 지옥과도 같게 되는 것이라. 이렇게 두고 보면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이가 누구냐고 다시 물으면 바로 임금보다도 오히려 영의정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아매도 이 나라가 이렇게 부정과 부패로 타락하여 온 백성이 굶주림과 노역에 시달리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 영의정 자리를 차고 앉은 악인 중에 악인, 바로 데스먼드 헤일러 대감 때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미 모두가 잠들고도 남았을 늦은 시간에 임금의 처소에 떡하니 머무르는 자가 있었으니, 마른 체형에 키가 크지만 돌맹이 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에 눈썹이 솔잎처럼 위로 치솟았고 눈이 표범 마냥 날카로우며 풍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수염을 쇄골 언저리까지 뾰족하게 다듬은 이 자가 바로 이 나라를 주름잡고 제 것마냥 휘두르는 영의정 데스먼드 로이엄 대감이렷다. 밤 늦은 시간에 관복도 입지 않고 양반 다리를 꼬고 앉아 임금과 대면하여 담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궁궐의 예절과 법도는 이미 무시하고도 남은 모양이로다.
"그래 요즘 백성들의 삶은 어떠하오?"
허연 잠옷 차림에 곤룡포는 구석에 벗어던지고 반쯤 침소에 누운 채로 임금이 묻는데, 자기 앞에 따로 술상을 받아 든 데스먼드 대감이 거만하게 술을 쭉 들이키며 대답한다.
"백성 모두가 전하를 우러르며 존경하고 있습니다."
"오 그래, 짐이 이 궐 밖으로 나가질 못하니 백성들의 존경을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소."
임금이 침소에서 몸을 일으켜 데스먼드 대감의 술상으로 다가와 안주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하였다.
"내가 평민으로 변장을 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보는 것은 어떠하오?"
데스먼드 대감이 술상에 다가와 안주를 집어먹는 임금을 내려다 보며 대꾸한다.
"직접 보아야만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보지 않고도 증거를 통해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감이 다시 한번 술을 쭉 들이킨다.
"궁의 창고마다 전국에서 세로 거두어들인 재물이 제 때 도착하여 채워지니 이 것이 주상께서 바른 정치를 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임금이 허허 하며 좋아한다.
"영의정의 그 조세권 제도는 정말 기막힌 수였던 것 같소. 선왕이신 명왕께서 집권하실 때는 세로 거두어들인 곡식과 산물들을 금전화 하는 것 부터가 번거로울 뿐 아니라 저 먼 지방에서 이 곳으로 재물을 옮기는 것 조차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보니, 아무리 닥달하여도 전국의 세금이 이곳으로 모이는데 시간이 늦어지고 누락이 생겼었는데 대감의 그 제도 덕분에 하루도 늦지 않고 모든 세를 정확히 거둘 수 있는 것 아니겠소."
술상에 가까이 다가와 대감을 올려다 보는 임금의 모습이 마치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의 모습 같더라. 하지만 배운 자라 하면 데스먼드 대감이 실시한 조세권 제도 즉, '세금을 거두어 들일 권리를 돈을 받고 파는 제도'가 이 나라를 얼마나 부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할 것이라. 데스먼드는 각 지방 도지사들에게 이 조세권을 팔면서 엄청난 웃돈을 받아 사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조정으로부터 조세권을 사들인 도지사들은 다시 한번 각 고을의 관리들에게 큰 웃돈을 받고 조세권을 넘기니 중첩된 웃돈들이 고스란히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케 되어 어마어마한 세금이 물리워지는 것이렷다. 게다가 세금을 거두어 들일 권리를 가지게 된 몹쓸 관청 관리들은 조세권을 사느라 탕진한 돈을 백성들로부터 만회하기 위해 가혹한 수탈을 하게 되었더라. 이처럼 나라가 병들어 가는 원인의 정점에는 언제나 이 데스먼드 대감이 있었던 것이다.
엉금엉금 기어서 침소로 돌아간 임금이 자리에 벌렁 드러누우며 묻는다.
"헌데 대감께서도 그 소문을 들었소?"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너른지방의 광주에 있는 바하이트 서생들이 큰 시위를 일으켰다 하던데."
임금의 말에 데스먼드 대감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한다.
"거 지방 학당의 서생들이 잠시 공부가 싫어 외도를 한 것 뿐일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전령을 통해 너른 지방으로 전갈을 보냈습니다. 지금쯤 전령이 충청을 지나 전라에 들어섰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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