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의 사내와 저스틴 경감의 기싸움을 지켜보던 도지사가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허리를 굽히고 있는 저스틴 경감을 향해 시비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한다.
"내 관청장에게 듣기로 그대가 술법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소. 허나 여기 전주 병부장도 무예에 있어서는 한가닥 하는 인물일세. 쉽게 보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네."
도지사의 말에 저스틴 경감이 고개는 숙인 채로 눈만 치켜 뜨며 관모 사내를 살펴보니 말과 행동이 거칠다 뿐, 그 다부진 체격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가 과연 평범한 칼잡이 수준은 아니더라. 하지만 저스틴 경감은 전혀 위축됨이 없이 점잖게 눈을 내리 깔면서 조용히 대꾸를 한다.
"자고로 정치가라 하면 큰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하는 법, 어찌 사소한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십니까. 벼슬에 계신 분이 국사를 돌보아야 할 시기에 이렇게 지방을 유랑하듯 돌며 유흥이나 즐기고 있으니 이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고 어찌 배기겠습니까."
고분고분하고 점잖은 말투이나 거칠고 따끔한 가시돌기가 가득 담긴 말이로다. 도지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 오르고 관모의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뿌드득 간다. 당장이라도 큰 사단이 날 기세로다.
"이 미친 놈이 목숨이 간당거리니 아예 실성을 했구나!"
뒤에서 잠자코 있던 슈미트 관청장이 발끈하여 대뜸 소리를 치는데 저스틴 경감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펴더니 몸을 돌려 저 멀리 관청 지붕 너머 북쪽으로 뻗어있는 산 능선을 지긋이 바라보며 나지막히 혼잣말을 중얼 거린다.
"하늘이 청명하여 바람도 선선하니 불길이 타오르기에 이만한 날씨가 없건마는, 어찌 불길은 이토록 솟을 기미가 보이질 않는가."
저스틴 경감의 알 수 없는 혼잣말에 관모의 사내가 껄껄거리며 웃는다.
"술법이라도 쓰실 셈인가! 그 잘난 술법을 외기 전에 내가 그 잘난 주둥이를 먼저 베어버리면 어쩌시려고."
술법이라는 말에 지레 뜨끔한 슈미트 관청장이 억지로 웃음소리를 지어내며 나선다.
"허허, 이 많은 관리들과 향리들 앞에서 감히 술법을 쓰겠다고? 술법은 허락없이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텐데."
이에 토티오 행감도 옳다구나 하며 동조한다.
"법도와 규율을 그리도 중시하시는 경부장께서 이제 어찌하는지 한번 지켜봐야겠구먼."
등을 돌린 채로 여전히 넉살 좋게 산만 바라보고 있는 저스틴 경감에게 도지사가 발끈하며 호통을 친다.
"이놈, 지금 네놈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느냐!"
그 때 저스틴 경감이 바라보고 있던 북쪽 산 능선 너머에서 뿌연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시커먼 연기가 되어 높이 솟아오르더라. 그제서야 저스틴 경감은 몸을 다시 도지사 쪽으로 돌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대꾸를 한다.
"도지사께서야 말로 지금 처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듯 합니다."
저스틴 경감의 태도에 도지사는 물론 옆에서 위협을 하던 관모의 사내, 슈미트 관청장 일행도 어리둥절해 하였다. 저스틴 경감이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관모 사내의 검을 손등으로 슬쩍 걷어내고는 앞으로 한걸음 나서니 그 태연함이 어찌다 당당하던지 관모 사내도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더라. 저스틴 경감은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뒷짐을 지고서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도지사에게 묻는다.
"도지사께서는 너른지방 순시를 핑계로 전라 북부를 떠난지가 얼마나 되었소이까."
"무... 무슨 헛소리를..."
저스틴 경감은 도지사의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욕지기를 중간에 끊어버리고는 막무가내로 말을 잇는다.
"여기저기 유랑하며 술마시고 노느라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관찰사로서 의무랍시고 이동네 저동네 다니며 지방 관리들에게 접대 받는 것에나 관심을 가지니 너른 지방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게지. 그냥 하던대로 산속 요정에서 술 접대 받으며 계집이나 끼고 있었으면 달아날 기회라도 얻었을 것을."
경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청 대문이 부서질듯 거칠게 열리고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십명의 관군들이 들이닥치는데, 하나같이 황금색 용 모양의 수가 놓여진 선홍빛 띠를 두른 것으로 보아 이 나라 임금께서 친히 지휘하여 다룬다는 조정의 어용군이렸다. 그 위세가 그야말로 대단하여 관청 대문에서부터 경부관까지 이르는 길의 모든 관리들이 기겁을 하고 흩어지고 관청내 병부 병사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며 발을 동동 구르기만 하더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도지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관청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관군의 선두에 선 장수가 경부관 문 안까지 말을 달려와 도지사의 눈 앞에서 말을 세워 내리니 도지사는 그자리에 주저앉아 말도 제대로 못하고 물밖에 나온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었다. 말에서 급히 내린 장수는 그대로 뚜벅뚜벅 걸어가 저스틴 경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호랑이 같은 목소리로 아뢴다.
"어용군 장수 배럿, 어사 나으리를 뵈옵니다. 어용군은 현재 군산 익산 전주를 지나 김제와 정읍까지 전라 북부를 모두 정리하였고, 전라 남부의 나주와 광주를 정리하기 위해 내장산을 넘고 있사옵니다. 어사 나으리의 명에 따라 어용군 중 일부만 이곳 목포 정리를 위해 급히 내달려 지금 도착하였사옵니다."
어사라는 말에 얼굴이 새파래진 도지사 일행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기만 한다. 이에 저스틴 경감이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장수에게 엄한 목소리로 명을 내린다.
"이 자들이 바로 녹을 먹으며 나라를 패악으로 더럽힌 너른 지방의 탐관오리들이다. 모두 목을 베고 재산을 환수하라."
"예이!"
장수가 큰 소리로 대답하니 그를 따라 나머지 관군들도 예이 하고 복창한다. 땅이 울릴 정도의 복창 소리에 슈미트 관청장을 비롯한 목포 관청 관리들은 이마를 바닥에 대며 울음을 터뜨리고, 도지사는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앉은 채로 오줌을 지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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