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5일 월요일

20. 장대 위의 등불들

그 무렵 드레이크 플럼은 대학당 바하이트의 서고에서 노엄 선생의 사상 서책을 깊이 탐독하고 있었는데 서고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며 계속 독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참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서고에서 서책을 보던 다른 서생들도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에 하나같이 집중하지 못하고 무슨일인가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더라. 처음에는 그저 잠깐 지나가는 소란이려니 하고 무시하려 했건마는 시끄러운 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금세 잦아들 일은 아닌가 하더라. 드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혹시나 또 관청으로 노엄선생 사건에 대해 시위를 하러 가는 무리들의 소란인가 하며 창문 밖을 내다 보려는데 난데없이 서고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온 몸을 갑주로 무장한 관군들이 서고 안으로 우르르 들이닥쳐 무언가 자기네들끼리 고함을 치듯 말을 주고 받으며 서고에 있던 서생들을 모두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이에 드레이크도 어느 한 관군의 손에 뒷덜미가 잡히어 밖으로 끌려 나가 서고 앞 마당에 짐짝마냥 내팽개쳐지었다. 겨우 몸을 가누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서고 앞 마당은 물론이고 바하이트 학당의 여기저기에서 관군들이 서생들을 끌고 나와 마당 여기 저기에 무리지어 모아 두고 무릎을 꿇리며 겁박을 하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더라.
"이게 무슨 일이오."
드레이크가 자신의 옆에 몸을 움츠린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서생에게 물으니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를 한다.
"나도 무슨 일인지 당최 모르겠소. 서책을 가지고 숙사로 돌아가다가 날벼락을 맞았소."
드레이크가 고개를 돌려 관군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보통 지방 병사들이 아니더라. 귀해 보이는 자색 비단 관복에 보기만 해도 섬뜩한 도검 하며 챙이 긴 관모에다 하나같이 황금색 용이 수놓아진 선홍빛 띠를 두른 것으로 보아 이들은 분명 임금의 군대라 불리우는 어용군이로다.
그 때 관군 병사 하나가 드레이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바로 옆에 있던 서생의 옷깃을 쥐고 일으키더니 말을 탄 관군 장수 앞으로 끌고가는데 말을 탄 장수의 옆에는 두꺼운 명부를 든 자가 명부를 넘겨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확인하고 있더라. 관군 병사가 서생을 끌고가 몸수색을 하고 나서 두꺼운 명부를 든 자에게로 무언가를 전달하니, 명부를 훑던 병사가 말을 탄 장수를 올려다 보며 큰 소리로 보고를 올린다.
"강원 속초에서 이 곳으로 유학을 온 베인가의 삼남이옵니다."
명부를 든 병사의 말에 말을 탄 장수가 쥐고 있던 검집을 옆으로 획 그어 보이며 말을 한다.
"이 자는 해당되지 않으니 풀어 주어라."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잡혔다가 풀려난 서생은 뒤를 흘깃흘깃 돌아보며 겁에 질려 학당 밖으로 달아난다. 예의 그 관군 병사가 다시 서생들 무리로 다가오더니 이번에는 드레이크를 끌어내어 장수 앞으로 데려간다. 관군 병사는 드레이크의 몸을 여기저기 뒤져 품 안에서 드레이크의 신분이 적힌 명패를 찾아내더니 거칠게 뜯어내어 명부를 든 자에게 건넨다. 이에 명부를 든 자가 예와 같이 한참을 명부를 뒤적이다가 이름을 발견한 듯 말 탄 장수에게 보고를 한다.
"전라 목포에서 유학을 온 플럼가의 장남이옵니다."
어쩌면 드레이크는 이 말에 어느정도 안심을 했으리라. 지금껏 플럼이라는 성씨의 유명세를 통해 많은 편의를 누렸던 드레이크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아버지의 도움을 받는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데 말 탄 장수가 난데없이 검집으로 드레이크의 어깨죽지를 따악 하고 내리치는게 아닌가. 어찌나 세게 맞았던지 순간 눈앞이 시커매지며 번뜩이는 불빛이 보일 정도였다.
"이 자는 포박하여 광주 관청으로 끌고 가라!"
예상치도 못한 몽둥이질에 드레이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어깨를 감싸쥐는데 신음을 토해낼 틈도 없이 장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용군 병사들이 드레이크에게 다가와 양 팔을 포박하여 대학당 밖의 어느 한적한 공터로 끌고가니 그 곳에는 드레이크와 마찬가지로 양 팔이 포박된 채로 웅크리고 앉은 서생들이 잔뜩 모여 있더라. 드레이크는 포박되어 모여있는 서생들 틈에 주저 앉으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조정의 어용군들은 서울에서만 지내던 관군들이라 플럼 가문을 잘 모르는 것일게야. 광주 관청으로 끌고 가라고 하였으니 그곳에 가서 관청 관리들에게 하소연하면 너른 지방을 주름잡는 아버지의 이름을 듣고 잘 처리해 줄 것이다.'
그 뒤로 학당 곳곳에서 신분을 확인하여 관청으로 끌고 갈 서생들과 풀어 줄 서생들을 가리는 작업이 한참동안 진행되었고, 드레이크의 이후로도 수많은 서생들이 영문도 모른 채 포박되어 끌려오니 바하이트 뒷편의 공터가 발 디딜 틈 없더라. 시간이 많이 지나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질 때 쯤 의문의 선별작업이 끝이 났다. 풀려난 서생들은 겁에 질려 어디론가 다 흩어져 도망가 버리고 포박된 서생들을 학당 바깥 공터에 따로 모두 모아두니 학당 전체가 폐허가 되어버린 듯 고요한 것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더라.
"지금부터 죄인들을 광주 관청으로 끌고 간다. 중도에 걸음이 뒤쳐지거나 이송에 방해가 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라!"
어용군 장수의 명에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고 죄수아닌 죄수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앞뒤로 포승줄에 포박되어 걸음을 옮기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으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줄이 손목을 파고드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나, 바하이트에서 관청까지는 그리 먼 길이 아니니 조금만 참자고 생각하는 드레이크였다.
'이제 곧 광주 관청에 가서 플럼가의 이름을 대면 이 고통은 금새 끝이 날 것이다.'
뉘엿뉘엿 지던 해는 어느새 서쪽 산능선을 넘어가 사방이 컴컴해지고 죄수아닌 죄수들의 행렬을 따라 어용군 병사들이 횃불을 밝히는데 선명해진 불빛 그림자들로 인해 그 모습이 더욱 처량해 보이더라. 평소에는 그리 가깝던 길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다리는 천근만근이로다. 이윽고 앞서 끌려가는 사람들 머리 위로 광주 관청의 대문 기와가 보이니 드레이크는 이제야 살았구나 싶어 다시 다리에 힘이 생기었다. 멀찍이 보이는 관청 담벼락을 따라 장대 위에 나란히 걸려있는 둥그런 등불들이 보이고, 줄줄이 이어진 행렬에 이끌리어 광주 관청으로 들어서는데 행렬 앞쪽에서 저마다 허억 하고 숨이 멎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대체 앞쪽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저러나 하면서 계속하여 발걸음을 옮기는데 처음에는 관청 담벼락을 따라 장대위에 대롱대롱 달아 놓은 등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니 그것이 다름아닌 시위때 보았던 광주 관청장과 관청의 각 부장 그리고 그 휘하의 관청 관리들의 잘린 머리들이 아닌가. 처녀귀신 치맛자락 마냥 펄럭이며 타오르는 시뻘건 횃불의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흔들리는 머리들 사이로 끌려 들어가는 서생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어 저마다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는 이들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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